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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부산일보] 2006.03.11. 부일시론 -정적, 침묵도 도시의 일부분

작성일
2006-03-11
작성자
최고관리자

각 자치단체별로 부산 시내 곳곳의 구조물,건축물 등에 야간경관 기법이 도입되어 빛을 발하기 시작한 것이 불과 몇 년간의 일이다. 야간경관 연출이 월드컵,APEC 등 외부 손님맞이에 동원된 감도 없지 않지만,부산의 밤거리가 워낙 어두웠고 낭만성이 없다보니 밤풍경이 관광자원화돼 도시 브랜드 제고에 기여하는 것도 사실이다.

대단지 아파트 옥탑에는 저마다 개성을 지닌 독특한 형태와 빛이 결합되고,광안대교 구포대교 등에는 시시각각 다양한 빛의 경관이 연출된다. 해운대에서는 백사장과 파도,빛이 어우러지는 파노라마가 있고,광안리에는 빛과 영상으로 연출되는 거대한 멀티미디어파크가 만들어 지고 있다. 관광객뿐만 아니라 부산에 사는 사람마저도 미처 몰랐던 부산의 풍광에 놀라며,빛이 만들어 내는 밤의 스펙터클 속에 빠져 들게 된다.

그러나 축제가 지난 지금,이러한 시도들이 우리 도시에 어떤 의미를 가지며,어떤 변화를 모색하는지 되돌아보자. 야단스럽게 쏘아 대는 레이저빔,시와 때를 가리지 않고 발산되는 형형색색의 요란스러운 빛은 도시의 어두움을 밝히는 고유의 기능에서 벗어났다. 더욱이 유흥가의 자극적인 간판들과 뒤엉켜 도시의 풍경을 왜곡시킬 뿐만 아니라,거주자들에게는 시각적 공해마저 유발하여 감각 기능마저 상실하게 한다.

천박한 조명에 비친 해운대 해변은 거대한 나이트클럽처럼 비틀어진 우화적인 모습으로 변모하여 씁쓸함을 느끼게 한다. 마치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듯 지나친 인공적인 연출 때문에 자연 그 자체의 미학적인 풍경이 비틀어진 것이다. 이벤트성 연출은 자칫 실속없는 판타지만 도시민에게 줄 수도 있다. 도시에 시끌벅적한 테마공원도 필요하지만,그렇다고 도시 전체가 테마공원이 될 수는 없지 않은가.

낮보다 더 긴 밤은 도시의 경관에서 방치할 수 없는 요소이기에 야간 경관 계획의 필요성은 누구나 공감한다. 그러나 섬세하게 조율되지 않은 야간 경관은 미관향상,안전성,야간 구심점 확보라는 순기능을 넘어서 도시의 일상을 비트는 연출에 머물 수 있다.

도시에는 일상적 삶이 만들어 내는 풍경이 무엇보다 가장 중요하다. 그러기에 유럽을 비롯한 선진도시의 밤은 오히려 우리보다 어둡고 고즈넉하다. 도시 역시 사람처럼 밤에는 쉴 권리가 있기 때문이다.

차제에 도시에서 소리,빛과 같은 감각의 관리에 대해 보다 근본적인 고민이 있어야 한다. 본다는 것은 빛을,듣고 말하는 것은 소리를 매개로 하는 만큼 소리와 빛은 인간의 커뮤니케이션의 기본 도구이다. 그러나 이미 현대에 있어 소리와 빛 등은 이미 그 본질 기능을 넘어,억압과 공해의 수준에 이르렀다. 이 모든 것은 과잉의 문제에서 비롯되었다.

"현대에 이르러,침묵은 죽음을 맞이했다." 옆집에서 시도 때도 없이 들려나오는 라디오 소리에 질린 나머지 집을 뛰쳐나갔던 일본 근대 소설가 나가이 가후가 했던 말이다. 현대 이전의 일상에 머물던 새소리,물소리,바람소리 등은 단지 그리움만 연상시키는 기억의 대상으로 밀려났다. 온갖 디지털적 기법과 상업적 기호로 무장한 인공의 빛이 우리 주변을 채워지기 시작한 순간,어느새 정적의 장소,침묵의 순간은 이 도시 어디에서 찾기 힘들다. 휴대폰벨,자동차 경적,공공사인 및 조명,광고,텔레비전,인터넷…. 바야흐로 온갖 매체에서 발산되는 잡음과 잡기호의 시대인 것이다.

먼저,우리 주변에 있는 현란한 네온사인류의 간판들,주거지 곳곳까지 번져있는 국적불명의 모텔류 등 일그러진 건물 치장 조명부터 조금씩 바꾸어 보자. 해변을 덮은 인공적인 소음 속에서 파도소리를 살려내 보자. 바꿀 수 있는 것은 바꾸고,어두운 채로 남겨두어야 할 것은 남겨둬 보자. 화이부동(和而不同)의 묘미로 밝음과 어두움,떠들썩함과 고요를 도시 속에 적절히 배치해 보자.

소리와 빛을 즐길 수 있는 권리만큼이나,정적과 어두움을 즐길 수 있는 권리도 있다. 고전으로 밀려난 그윽한 아름다움을 다시금 우리에게 찾아와야 할 때이다. 고요,어두움,여백 등은 화려하진 않지만 모든 소통이 시작되는 출발점이자 도시의 행간이고,일상생활의 중요한 부분인 것이다.

"진정한 침묵을 지니지 못한 도시는 멸망해야만 비로소 침묵을 지닌다." 침묵의 철학자 막스 피카르트의 경구를 돌이켜 볼 만하다.  -김명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