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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부산일보] 2003.01.21. 부산에 살고 싶다- 달맞이 언덕

작성일
2003-01-21
작성자
최고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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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해남부선 열차에 몸을 실어 보면 그 속엔 짧지만 아름다운 시간이 기다리고 있다. 부산역이든 부전역이든 혹은 동래역이든 어디든 발길 닿는 곳이면 출발역이 된다. 열차가 해운대역을 벗어나 미포에 접어들면 어렴풋이 바다가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바다와 하늘이 만들어 내는 절경 사이에 자리 잡은 청사포 구덕포를 지나 송정에 다다르는 동안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해안선 구간의 절경에 취하게 된다. 불과 10여분도 안되는 짧은 구간이지만 자연이 주는 장대함에 빠지게 된다. 일출 혹은 일몰 시간대엔 여행의 백미가 더해진다.

대한팔경의 하나로 손꼽히는 달맞이언덕은 카페촌과 갤러리 등이 들어선 한국형 몽마르트르라는 낭만적인 찬사를 듣기도 하지만 이면에는 지난 20여년간 무분별한 난개발로 경관과 생태계가 파괴되어 심한 몸살을 앓고 있다. 한 층이라도 더 지으려는 사유재산권의 논리와 자연 보존이라는 공적 가치가 첨예하게 대립하기도 한다.

간혹 옛 사진을 보면 달맞이언덕이 있는 와우산 정상이 소나무 숲으로 덮여 있는 자연 그대로의 모습과 스카이라인으로 살아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하지만 이제 그런 모습은 없다. 단지 빌라들로 뒤덮인 달맞이언덕의 풍경은 인간 욕망이 자연에 가한 상처의 보고서로 남아 있을 뿐이다.

반면 달맞이언덕 아래 해안선을 따라 스치며 지나가는 철로변은 여전히 자연의 비경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이처럼 달맞이언덕은 다양한 스펙트럼을 가지고 있다.

달맞이길은 강원도 인제를 출발하여 태백 포항 울산 등을 거쳐 내려온 31번 국도가 계속 이어지는 길이다. 백두대간의 준령을 넘어온 길의 여운처럼 산허리를 거세게 휘감아 돈다. 와우산 능선을 열다섯 번 굽어 돈다고 사람들은 달맞이길을 15곡도(曲道)라고 부르기도 한다.

달맞이언덕이 지금의 모습으로 조성되기 시작한 건 20여년 전이다. 1980년대 초 전국토의 공원화 사업 즈음에 달맞이길은 자연석으로 경계를 삼고 벚나무를 심어 오늘의 아름다운 경관을 이루게 되었다. 해운대와 달맞이언덕 사이에 있었던 골프장이 철거되면서 시민들의 자연스런 접근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이후 만사드(완만한 경사로 되어 있는 서양식 지붕)풍 고급빌라들이 들어서고 음식점들도 하나 둘 자리 잡았다. 3㎞ 남짓한 고갯길을 따라 들어선 레스토랑과 카페들은 마치 메뉴판의 갖가지 음식종류만큼 다양한 형태를 가지고 있다.

더불어 동백아트센터 칸지 몽마르트르 열린 마린 등의 갤러리와 추리문학관 같은 공간은 문화적인 색채를 더한다. 이들 공간은 시민들 뿐만 아니라 부산을 찾는 외지인들에게 독특한 이미지를 준다. 하늘 아래 달동네는 도시서민의 애환이 서린 곳이지만 바다 위 달맞이언덕은 그렇지 않다. 하지만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듯 다양한 문화공간들이 카페촌을 형성하는 데 일조했으나 이제는 오히려 상업시설들에 밀려 떠나기도 한다.

한때 신흥 부자들이 양산했던 강남의 국적불명 변종 주거문화와 카페문화가 그대로 이식된 듯한 느낌이다. 어차피 도시와 문화의 전후방에는 아방가르드와 키치가 존재하지 않는가? 도시와 동떨어진 섬처럼 이 곳만의 숨결이 있고 여유로움도 있다.

이런 바깥 풍광만이 달맞이언덕의 전부는 아니다. 숨은 매력이 있다. 송정으로 접어드는 고갯 마루에서 길을 돌려 청사포로 내려가 보자. 열다섯 번이나 굽이치는 달맞이길 아래에 자리 잡은 포구이니 만큼 의외의 사연도 많다.

시인 최원준은 청사포를 '폐선같은,겨울포구'라며 다음과 같이 노래했다. '이웃들이 다- 떠나가네/폐선같은,겨울포구/쓰러진 마을 남겨둔 채/남루한 사랑으로 떠나가네//질경이같이 뿌리 깊은 타지의 절망,/우리의 사랑은 청사포로 젖어들고/결국 지친 몸들을 이끌고 되돌아오는 길'.

화가 이만익은 옅은 색감과 검은 먹선,굵고 짧은 점으로만 청사포 마을 전경을 표현했다. 이처럼 청사포는 달맞이언덕의 들뜬 정서와는 사뭇 다르게 정제된 느낌으로 다가선다. 이 조그만 포구에 의외로 오랜 시간의 내력이 숨어 있음을 알면 청사포가 주는 감흥의 깊이도 더해 질 듯하다.

청사포 남쪽에는 배 타고 나간 지아비에 대한 아낙네의 사랑이 서린 수령 300년의 망부송이 있어 눈길을 잡는다. 그런데 부산에서 가장 오래된 선사 시대의 유물이 청사포 철로변에서 출토된 걸 알면 설화의 막연한 애틋함 이상으로 심층에 대한 경이로움을 느끼게 된다. 지난 90년,청사포에서 주먹도끼 망치돌 등 깬석기들이 발견되었는데 이는 1만여년 전 구석기인들이 사용하던 유물들이다. 바다에서 먹거리를 구하던 도구일 것이다. 1만여년 전 구석기인이나 망부송의 아낙네 혹은 지친 몸을 이끌고 청사포에 찾아드는 우리들 모두가 같은 청사포 바다를 바라보는 것일 테고 청사포에 젖어드는 사랑도 다르지 않을 듯하다.

지금 달맞이언덕도,1만여년의 사랑을 간직한 청사포도 변하고 있다. 청사포 앞을 스치며 지나가는 동해남부선도 변한다고 한다. 철도청이 동해남부선을 복선화하여 해운대 신시가지 북쪽을 관통하여 수영역과 송정역을 바로 연결하니 해운대와 송정구간의 단선 철로는 기능을 상실할 운명이다. 따라서 달맞이언덕 아래,천혜의 자연경관 속에 방치될 폐선(廢線) 구간에 대한 활용 방안은 새로운 관심사이다.

개발과 보존의 딜레마 속에 신음해온 달맞이언덕으로서는 또 한 번 전기를 맞은 셈이다. 폐선의 미래가 곧,그나마 철로로 인해 개발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던 달맞이언덕 아래 해안구간의 미래인 것이다. 동해남부선 폐선 구간에 대한 해법이 앞으로 달맞이언덕의 모델이 될 듯하다.

'멈춤'이라는 키워드로 진행된 '2002 광주비엔날레'에 의미심장한 전시가 있었다. 광주시내를 관통하던 단선철도가 폐선구간으로 변모한 곳에 20여개 팀의 국내외 건축가 환경예술가들이 다양한 아이디어를 내놓은 공공예술프로젝트였다.

이 전시는 도시와 시민과의 연결/접속의 잠재력을 갖고 있는 이 질문의 땅에 공공예술 프로젝트를 제안함으로써 재활용,대지미술,도시 생태,도시산책 등 다양한 주제들을 실현하는 구체적인 예들을 선보였다.

막연히 흉물로 방치될 철도구조물이 도시의 녹지축을 연결하는 녹지도로가 된다든지,어린이놀이터로 재활용되는 등 도시의 기능을 재활성화시키는 모티브가 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광주비엔날레의 제안처럼 달맞이언덕 아래의 폐선구간에도 재생에 필요한 다양한 아이디어가 생성될 것이다. 중요한 것은 단순히 여태껏 달맞이언덕을 바라보았던 자연과 건축,사유와 공유 등의 이항대립적인 구도에서 벗어나 자연과 건축,인간이 유기적으로 소통되고 접속되는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는 점이다.

여전히 달맞이언덕은 차가 없으면 접근하기 어렵고 외지인에게든 부산시민에게든 낯선 공간으로 남은 채 바라만 봐야 하는 곳으로만 남아 있다.

이제 달맞이언덕도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그들만의 공간이 아닌 우리들의 밝은 미래가 돼야 한다.   -김명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