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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부산일보] 2002.11.12. 부산에 살고 싶다 -대연동 문화벨트, 도시속의 '여백'

작성일
2002-11-12
작성자
최고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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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의 빌바오에 세워진

구겐하임미술관이나 스위스

루체른의 '문화컨벤션센터' 등은

문화시설 하나가 침체된 도시를

새롭게 재생시킬 수도 있음을 보여준다.

문화도시라고 일컬어지는 대부분의

선진도시에는 자생적으로 또는 정책적으로

만들어진 문화시설이 군집된 박물관거리,

미술관 거리 등이 가지고 있다.

# 새로운 가능성의 문화거리

이런 도시를 보면, 도시를 구성하는 최소 단위인 방으로부터 건축,거리,모두가 융합되어 독특한 문화적인 경관을 만들어 내고 도시인에게 일상적인 삶으로부터 비일상적인 체험을 제공한다.

우리가 거주하는 부산에도 이런 가능성을 지닌 가치 있는 도시 공간이 존재한다. 부산문화회관,부산시립박물관,유엔기념공원,유엔조각공원이 밀집해 있는 대연동 일대의 문화공간이 그러하다. 무엇보다 이곳이 반가운 것은 문화공간의 존재 자체도 그렇지만 적정한 외부공간과 어우러져 도심형 공원과도 같이 도시 속에 비어 있는 공간을 제공한다는 점이다.

이곳은 문화경관과 자연경관이 적절히 유기적으로 엮여져 있어서 산과 집,도로 등으로 빼곡이 채워져 있는 부산이라는 도시에 모처럼 평면적인 여백의 공간으로 존재한다. 문화향유에 대한 막연한 채무감마저도 벗어 주게 하는 여유로움이 이 곳엔 있다.

대연동 문화벨트에서는 각각의 영역에 건축물들이 오브제처럼 자리잡아 거대한 조형물의 전시장을 산책하는 듯하다. 유엔참전기념탑이 있는 교차로에서 시작하여 부산시립박물관,유엔조각공원,유엔기념공원을 거쳐 부산문화회관까지 걸어보면 이 속엔 근대성,역사성,추상성 등의 건축언어가 잠자듯이 혹은 깨어 있는 듯 서로 간에 중첩되어 있음을 느끼게 된다.

 

# 역사성,근대성,추상성 중첩

 

반경 300m 내에 걸어서 2km 정도의 문화벨트는 걷는 즐거움과 보는 즐거움을 함께 준다. 먼저 시립박물관에서 길을 나서 보자. 부산시립박물관은 제1전시실의 구관과 제2전시실의 신관,두 개의 건물로 구성되어있다. 제1전시실은 'ㅁ'자로 구성된 건축물로 중앙에 중정이 있고,이를 에워싸며 선사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의 유물이 전시되어 있다. 'ㅁ' 공간을 따라 발걸음을 옮기다 보면 연결브리지를 거쳐 근· 현대사 자료 위주의 정방형으로 이루어진 공간을 만나게 되는데 여기는 제2전시실이다.

정사각형 입방체로 구성된 시립박물관의 조형은 바닥에서 들어 올린 기단과 기둥,지붕이 분리되어 있고 외부 벽면의 문양과 창호 문살 등의 전통적인 양식을 보면 시립박물관이 한국 전통건축 형식이 추상적으로 재현되었음을 알 수 있다.

유엔조각공원은 5천평 정도의 대지 위에 한국전쟁 참전국의 조각가들이 제작한 29점의 조작 작품으로 구성되어 있다.

조각품들 틈사이로 푸른 잔디 공원이 보이는데,여기가 유엔기념공원이다. 원래의 이름은 유엔묘지였지만 2001년 3월에 유엔기념공원으로 개칭되었다. 1951년에 묘역이 조성되었으니 30년 만에 묘지가 공원으로 바뀐 셈이다. 여전히 200,300 여기의 유해가 이국 땅에 사연을 묻고 있으나 이미 세월도 이름이 바뀔 만큼 적잖이 흐른 듯 하다. 묘역 옆에 자그마하게 자리 잡고 '1995.4.29. 호주의 한 전몰병사에게 부인과 딸이 바치는 두 그루의 주목' 이라는 표식지를 매단 채 서 있는 두 그루의 상록수는 추모공원 이상의 의미를 되새겨 준다.

역설적이긴 하지만 유엔묘지였기에 어쩌면 지금 우리에게 4만5천평이라는 넓은 녹지가 도심내 공원으로 남아 있는 지 모른다.

참전국 각국에서 보내준 나무들로 조경된 공원 안을 돌아 나서면 독특한 조형의 두 건축물을 볼 수 있다. 한국현대 건축의 거장 중의 한 사람인 김중업씨가 설계한 유엔묘지(기념공원) 정문과 추도관이 그것이다.

추도관은 삼각형의 정형을 띤 건축물로 6개의 들보가 지붕을 매단 형태로 되어 있어 기하학적인 간결미와 엄정성을 갖추고 있다. 반면 유엔묘지정문은 전통미에 바탕을 둔 듯하면서도 건축가의 자유로운 상상력과 조형의지가 배어 있는 작품이다. 세계 각지에 흩어져 있는 유엔의 건축물들 중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호평을 듣기도 한다는 이 건축물은 땅,기둥,지붕이 모두 분리,자립되어 있는 모습이다.

전통적인 한옥을 모티브로 한 지붕은 하늘과 땅을 가르는 듯 날렵한 인상을 준다. 지붕을 가볍게 받치고 있는 8개의 십자형 기둥은 대지와 가볍게 맞닿아 있고 마치 땅에서 자란 나무 가지를 틀어 천창을 향하는 듯 하다.

천창을 통한 빛은 나무를 형상화한 기둥을 비추어 대지,기둥,지붕이 빛을 매개로 하나로 엮인 모습이다. 건축이 시어(詩語)로 응축되어 콘크리트 물성 이상의 의미를 보여 준다. 묘지에 서 있는 정문이 생명력을 끌어 들이기 위하는 듯한 조형으로 만들어져 마치 죽음의 공간과 생명의 공간이 교차되는 듯하여 단순한 조형적 아름다움을 넘어서 비감한 느낌마저 들게 한다.

정문을 입구에서 보지 않고 굳이 밖을 나서며 뒤에 서서 보는 이유는 기념공원 입구 측면에 생긴 구조물 때문이다. 유엔기념공원 입구에서 바라보면 터널로 인해 정문의 자유로운 조형성이 상실되어 정문이 지닌 낭만성을 체험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 터널은 문화벨트 조성 사업의 일환으로 유엔기념공원,시립박물관과 문화회관을 동선으로 연결하기 위해 만든 구조물이므로 전체를 위해 개체가 희생된 아이러니를 보여준다.

유엔기념공원을 나와서 잔디광장으로 올라서면 눈앞에 부산문화회관이 있다.대강당을 중심으로 좌우로 중강당,소강당이 'ㄷ'자형 배치 형태로 앉아 있다.

전통 가옥의 전형적인 배치 기법으로 한국 전통 건축기법을 충실히 따르고 있다. 'ㄷ'자형의 중앙 마당에 서서 뒤를 돌아보면 시립박물관,유엔기념공원 등 문화벨트내의 시설들과 멀리 광안대교,달맞이고개까지 한 눈에 들어온다.

 

# 문화와 자연이 있다

 

건물 외관에 한국적 정서를 표현하는 열주,문양,서까래,처마,지붕 등을 바탕으로 디자인되었다. 한국적인 것과 현대적인 보편미를 조합시키려 애쓴 건축물이긴 하지만 기념비성이 지나치게 강조되어 문화회관치고는 권위적인 외양이 느껴진다. 전통성의 표현에 대한 지나친 의무감은 관제 문화시설에 너나할 것 없이 적용되어 부산시립박물관에서도 마찬가지의 모습이 드러난다.

유엔묘지정문(1966),부산시립박물관(1978),부산문화회관(1988) 등이 세워졌던 20여년은 한국건축이 전통성에 대한 치열한 논의를 벌였던 시기였다.

근대성과 탈근대성의 고민이 섞인 채 어정쩡한 절충형의 한국식 문화시설들이 양산되어 중앙의 세종문화회관과 경주박물관을 정전으로 한 전형의 건축물들이 지방 도처에 세워졌다.

그러나 어차피 건축은 역사의 지킴이로서 우리의 문화적인 단면을 보여 주게 마련이다. 지금 우리에게 가치 있는 의미로 남아야 하는 것은 민족,역사,전통 등의 거대 담론에서 벗어나 도시 내에 존재하는 이 문화시설들을 가치 있게 하는 가능성의 확장일 것이다.

건축물은 주변의 자연,문화 행위들,그리고 이 곳을 찾는 방문객들을 이어주는 배경이면 그만인 것이다. 문화의 거리를 재활성화 시키는 것은 결국 사람이다.   -김명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