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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부산일보] 2002.12.24. 부산에 살고 싶다- 중앙공원, 시공간이 집적된 상징

작성일
2002-12-24
작성자
최고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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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각을 치유하기 위해 부유하는 인간들을 그린 '나비'(2001년 작,문승욱 감독)란 영화가 있다. 부산을 주요무대로 촬영됐던 이 영화의 장면 중에 나선형 램프가 벽을 감싸며 내려오는 강렬한 느낌의 원형 공간이 등장한다. 이 곳은 영화 속에서 기억을 잃은 이들의 치유소로 묘사되는데 백색의 미니멀한 공간이 검은 옷을 입은 채 망각으로 신음하는 이들과 묘하게 대비된다.


# 기억과 망각의 역설적 공간

이 장면의 촬영지는 부산민주공원 민주항쟁기념관의 중앙에 위치한 원형홀이다. 민주항쟁기념관이 한국근현대사를 관통하며 일어났던 부산지역의 민주화 운동에 대한 기억을 보존키 위한 장소이고 보면 영화속 망각과 기억의 대칭점에서 부유하는 인간들의 요양소로 설정된 것은 적절한 선택인 듯하다.

일상과 비일상적인 기억,망각이 공존하는 도시 속에는 기억과 기념을 위한 건축적 공간이 있다. 중앙공원이 그런 곳이다. 공원은 영주동의 산복도로 끝자락을 벗어나서 초량의 구봉산과 대신동의 구덕산을 잇는 능선에 위치하고 있다.

부산의 지붕이라 할만한 이 곳을 찾는 재미와 의미는 부산의 시간과 공간을 동시에 호흡할 수 있다는 데 있다. 중앙공원이 공식적인 이름이며 대청공원과 부산민주공원 등 여러 곳을 함께 아우르고 있다.

이 공원영역 내에는 민주항쟁기념관 광복기념관 충혼탑 중앙도서관이 산책로 대한해협전승기념비 조각공원과 매개되어 배치되어 있다.

 

# 시대의 이데올로기 반영한 건축물들

 

이 건축물들은 특정한 시기의 역사나 가치를 기억하기 위한 기념비적인 공간들로 시기에 따라 기념 방식을 달리하며 부산의 역사를 이야기한다. 1980년대에 세워진 충혼탑의 경우,주변 산세의 스카이라인을 압도하는 수직적인 큰 스케일로 기념비성을 표현하고 있다.

반면 1990년대에 지어진 민주항쟁기념관과 광복기념관의 경우,주변의 지형과 시각적으로 넘나들면서 내부의 길을 매개로 건축이 구성되는 수평적인 공간으로 이루어져 있다. 건축이 그 시대의 이데올로기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충혼탑은 전몰군경 추모 위령탑으로 9개의 벽체가 원형 열주로 구성되어 70m 높이의 탑을 이룬다. 탑신은 원형 연못 위에서 솟아오르는 듯한 형상을 취하고 있고 그 아래엔 위패가 안치된 반구형의 방이 있다. 중앙공원의 마당에서 계단을 거쳐 충혼탑까지는 하나의 축선 아래 정렬되어 있고 반구형의 조형물 등의 요소는 추상적인 모습이다. 하나의 완벽한 체계 속에 구축된 조형물은 규모가 주는 위압감과 더불어 비장감마저 던져 준다. 조형물 자체가 프로파간다 그 자체인 것이다.

민주항쟁기념관은 보다 복합적인 방식으로 메시지를 전해준다. 기존의 자연지형 속에 그대로 건축물이 삽입된 지하 1층,지상 3층의 건축물이지만 각 층에서 외부와 연결되는 구조이다. 중심의 원형공간은 외부 공간처럼 만들어져 건축물의 안과 밖의 경계가 모호한 형식이다. 외부로 드러나는 건축의 형태는 최대한 억제하고 오히려 외부 공간과의 연계에 초점이 맞추어진 모습이다.

원형 공간에는 자연광에 반사되어 빛을 발하는 역삼각형의 떠있는 조형물인 '민주의 횃불'이 있고 부산민주화운동의 통시적 과정이 '민주의 문,회상의 숲,부산의 함성,확산의 망,공공성의 파괴와 생성,연대의 공간,영상미상,추모의 공간,희망의 빛'으로 구성된 전시실에 전개되어 있다. '고난의 장,추념의 장,염원의 장,정의의 장' 등으로 명명된 외부 공간들이 일주도로와 연결되어 외부공간을 이루고 있다. 건축과 자연의 매끄러운 만남에 비해 오히려 개별 공간들은 지나치게 상징화되어 민주공원 전체가 하나의 슬로건 속에 갇혀 버린 양상이다.

민주공원 아래 쪽 자그마한 2층 건축물이 광복기념관이다. 'ㄱ'자 형태로 두 개의 튜브가 엇각으로 교차된 이 건축물은 1층이 기둥으로만 구성된 피로티 형식으로 시야가 확 트이도록 해준다. 경사지를 따라 만들어진 지하층 역시 도시를 향해 개방된 형식이다. 건축물의 가운데에는 중정이 있고 이를 감싼 튜브의 흐름을 따라 각 방향에서 보는 모습은 제각기 다른 형태로 드러난다.

건축물은 도시와 자연의 접점에서 건축에서 도시,도시에서 건축으로 다양한 소통의 열린 구조를 지니고 있다. 상징성이 강조되어야 할 건축물이지만 오히려 자연지세 경관 등 도시 그 자체에 충실함으로써 강박적인 기념비성에서 벗어나 도시와의 호흡을 우선시하는 일상성이 두드러진다.

 

# 기억의 방법들 새롭게 모색할 때

 

중앙공원의 건축물들은 상징과 기념에 대한 제각각의 해석으로 기억의 재현을 다양하게 보여준다. 잊고 싶은 것과 잊어서 안 되는 것은 동전의 양면처럼 일상 속에 붙어있는 하나의 현상이다. 역사적 사실은 조금의 가감없이 그대로일 때가 가장 감동적이다. 극화되거나 과도하거나 혹은 적절치 못한 상징은 오히려 기억에 대한 깊이를 없애 버리는 경우도 많다.

1980년대 독일의 '하르부르그'란 도시는 나치에 대항했던 기념탑을 공모하였는데 격론 끝에 당선된 작품은 '사라짐'을 테마로 한 12m 높이의 납으로 된 탑이었다. 시민들이 북적대는 시장 한 복판에 세워져 매년 2m씩 땅 밑으로 사라지게끔 고안되었고 6년 뒤에는 땅 위에 흔적만 남긴 채 완전히 사라졌다. 역사는 기억 속에 잊혀져 가는 것임을 보여 주었고 물리적인 기념비로는 그들이 겪었던 깊은 상처를 치유할 수 없음을 역설적으로 항변하였다. 기념비가 역사를 증언할 수 없음을 보여준 것이다.

파리의 세느강,시테섬의 끝 모퉁이에 위치한 프랑스 유태인 레지스탕스 기념관은 좁은 계단을 지나 만나는 조그만 광장이 전부이다. 나치에게 학살된 레지스탕스를 추모하기 위한 곳인데 폐쇄된 광장의 벽들이 갇힌 곳임을 암시한다. 극도로 고요하고 절제된 공간은 전율을 자아낸다. 방문자들을 위한 어떠한 구체적인 설명도 없다. 단지 벽면의 쇠창살 너머로 보이는 세느강만이 역사를 증언할 따름이다. 비움으로써 오히려 더 강렬한 역사적 사실을 증언하는 예들이다.

중앙공원의 곳곳에서 내려다보이는 부산의 모습은 그야말로 장대하다. 이 경관이 아름다운 것은 그 속에 담겨 있는 자글자글한 일상의 집적 때문이다. 중앙공원에는 상징이 가득하지만,오히려 거기서 바라본 부산항의 모습이 부산 그 자체의 기억과 상징을 우리들 일상에 포개 더 잘 드러내주고 있다. 이제 우리의 도시도 기억의 방법들을 새롭게 되새겨 볼 때이다. 도시의 기억들은 역시 일상 속에 묻혀 있어야 진정한 가치를 지닌다.   -김명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