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부산일보] 2006.09.27. 부일시론 -걷고 싶고, 걸을 수 있는 도시
- 작성일
- 2006-09-27
- 작성자
- 최고관리자
요즘 테라스 거리로 뜨고 있는 동네가 경기도 분당의 정자동이다. 4차선 도로 양옆에는 약 300m에 이르는 거리에 테라스가 늘어서 있고,테라스 안에는 테이블 벤치 화단 등이 아담하게 꾸며져 있다. 마치 유럽의 어느 거리에 있는 착각마저 불러일으키며,답답한 도시공간에서 거리를 걷는 즐거움과 편안함은 물론이고,묘한 해방감마저 준다.
그래서 건물과 차로,그 사이의 공간은 철저하게 사람 중심이어야 한다. 자동차로부터 해방되어 보행자 전용 공간과 테라스 등을 통해 쉽게 걸을 수 있어야 하고,편히 쉴 수 있어야 한다. 이런 공간들이 삭막한 도시에서 건물과 사람,거리와 사람,사람과 사람들을 소통시키고,교감하게 해준다. 어쩌면 거리문화의 다양한 기운도 이 속에서 생성되는 것이다. 평범했던 분당의 정자동이 테라스와 보행자 공간의 확보라는 변화로 거리 주변 상가의 시세는 말할 것도 없고,인근의 아파트 시세까지 3년 새 배 이상 올랐단다.
부산의 경우를 보자. 건물과 차로사이에서 테라스,보행자 전용 공간 등 사람중심의 소통 공간은 고사하고,최소한의 보행권마저 없다. 2004년 보행 중 교통사고 발생률이 7대 광역시 중에서 1위라는 사실은 부산의 열악한 보행 공간 현실을 잘 말해준다. 최소한의 인도와 차도와의 구분마저 모호하고,그나마 있는 인도조차도 노폭이 협소하기 이를 데 없다. 결국 산복도로 인근의 경사지역 등 자동차가 다닐 수 없는 극단적인 공간구조에서야 보행자 전용의 길들이 만들어지는 역설적인 상황이 벌어진다.
그럼에도 여전히 교통정책의 1순위는 자동차 위주이며,교통공간개선 역시 자동차도로 확충에 매달려 있다. 보행 환경 개선은 그야말로 시범거리 조성사업 등 생색내기에 그친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따져보면,도로율 1% 증가에 소요되는 비용이 보상비,건설비 등 2조5천억원 정도이며,가용 재원의 60% 정도가 투입된다. 지난 4년간 부산의 연평균 도로 증가율이 0.4%임에 반해 승용차 증가율이 6.0%로,자동차 도로 확충에 의한 교통난 해소는 그야말로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이다.
이제는 도시의 패러다임을 바꿔야 할 때이다. 자동차중심도시로서 폐해를 먼저 경험했던 서구사회는 보차공존적 도시로,또 더 나아가 자동차 탈피의 보행자중심도시로 이행하고 있다. 자동차의 역할을 자전거 등 녹색교통수단이 대체하고,도심부의 자동차가 빈 자리에는 보행자 위주의 공간을 조성하여 쾌적한 친환경적 도시가 되도록 하고 있다. 빈,암스테르담 등 유럽의 많은 도시에서는 도시 내 차량속도를 30㎞ 이내로 제한하고,보행자 전용 구역 설치 등 보행자 중심의 교통 정책으로 선회하였다.
자동차 천국이라는 뉴욕에서도 보행자권리장전 등을 통해 "도시는 보행자를 무시해서는 안 된다. … 거리는 인간 모두의 희망과 문화를 위한 것이다"라고 직시하며,넘쳐나는 자동차 틈에서 보행권리를 구현하고,그에 걸맞도록 가로 환경을 개선시키고 있다.
사실,도시 내에서 사람과 교통수단과의 반목은 자동차의 출현 이전에도 있었다. 예를 들어,줄리우스 카이사르는 보행자 우선 정책으로 일출 후 일몰까지 마차의 운행을 금지시킨 일이 있다. 그로 인해 야간의 마차소음으로 로마시민들의 민원이 빈번했다는 기록도 있으니까. 보행자 권리에 대한 위정자의 인식만큼은 2000년 전이지만 지금보다도 배울 점이 많다.
보행권의 확보는 우선 보행공간을 만드는 것에서 시작된다. 차로 폭을 줄이는 '도로 다이어트(Road-Diet)'와 차로 수 축소도 적극적으로 검토해 보자. 우리나라의 차로 너비는 일본이나 유럽보다도 넓어 시내 차량제한속도가 상대적으로 높고 과속사고가 빈번하며,넓은 차로 너비 때문에 불법 주차 역시 만연한 상태이다. 이런 교통문제도 해결하며,차로에서 확보된 여분의 공간은 보행공간으로 전환될 수 있다. 물론 차로 너비를 줄이면 자동차 속도가 제한될 수밖에 없는데,지금껏 누려온 자동차 기득권을 시민들이 포기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지금 부산비엔날레의 야외전시가 열리는 지하철 부산대역 인근 온천천변을 걸어보자. 쾌쾌한 냄새,콘크리트 덩어리로 둘러싸인 열악한 공간이긴 해도 자동차로부터 해방된 보행의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다. 또 지하철역 2,3구간 정도는 도보가 그 어느 교통수단보다 빠름을 경험할 수도 있다.
방바닥에 드러누워서 하는 생각보다는 책상 머리맡에 앉아서 하는 생각이 훨씬 안정적이다. 또,앉아서 하는 생각보다는 두 다리로 길을 걸으면서 하는 생각이 보다 복합적이고 창의적이며,균형 잡힌 경우가 많다. 어쩌면 보행의 즐거움이야말로 가장 생산적인 인간행위의 산물이다. 걷고 싶은 도시,걸을 수 있는 도시가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최소한의 조건이자 출발점이다. -김명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