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부산일보] 2006.05.27. 부일시론 -아파트, 브랜드 거품을 빼자
- 작성일
- 2006-0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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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워팰리스,하이페리온,캐슬모닝,미켈란쉐르빌,아카데미스위트,골드파크뷰,등등….
길을 가면서,혹은 분양광고 속에 흔하게 마주치는 아파트의 이름들이다. 집 한 채 마련이 서민들의 꿈이다 보니,이름 속에는 귀족주의,배금주의 등 온갖 호사스러운 자본주의적 욕망이 모두 포함되어 있고,서로들 아파트에 차별을 주기 위한 필사적인 노력이 보기에 안쓰럽다.
그 유래도 알기 힘든 영어 단어의 조합에서 요즘은 불어 단어의 조합 정도는 되어야 세련된 추세인 듯하다. 저 푸른 초원 위에 살고 싶다는 욕망 때문인지 좀 생뚱맞긴 하지만,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노르웨이의 숲'도 등장했다.
요즘은 포장이 내용을 규정하는 브랜드파워의 시대이니 만큼,아파트도 예외가 아닐 것이다. 그러다보니,'푸르지오'를 모방한 푸르지요가 등장하고,'래미안'을 흉내낸 라미안이 등장하여 실소를 자아내는 등 대기업 브랜드를 모방한 짝퉁 아파트도 등장하여 세간의 시비 거리가 되기도 한다.
또,몇 십년간 잘 살아온 멀쩡한 아파트 이름을 요즘 유행하는 무슨무슨 파크뷰니,무슨무슨 팰리스빌 등등으로 개명하여 집값을 올렸다는 무용담도 들린다.
한때,개나리마을,무지개마을 등 아파트 단지를 순우리말로 사용한 적도 있었다. 그 또한 마치 양복 입고 갓 쓴 모양처럼 도무지 어색하긴 매한가지이다. 아파트의 이름만큼은 어떤 작명의 대가도 그리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사실 돌이켜보면 집 이름에 대한 애착은 매우 뿌리가 깊다. 현판마다 갖은 의미를 담아 세우는 등,우리나라만큼 집과 이름의 관계가 깊은 나라는 없을 것이다.
옛집은 그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의 흔적을 고스란히 담고 있었고,우리 선조들은 집 이름을 자신의 호로 쓸 정도로 '집'을 단순히 먹고 자는 물리적인 공간 이상의 의미로 받아 들였다.
그 뿐만 아니라,회재 이언적 선생의 독락당,안동에 있는 퇴계 이황선생의 도산서원 등에서 볼 수 있듯이,집은 물론이고,집을 둘러싼 외부 공간 즉,바위 하나,나무 하나에도 이름을 붙여 주변 환경과 더불어 살았던 경우도 많았다.
많은 자연 미물들이 자기 이름을 가지면서,거주자와 자연이 하나가 되어,비로소 의미와 질서를 가지게 되었던 것이다.
사람이 집을 만들고,집이 사람을 만든다는 얘기가 있다. 옛사람들의 집 이름에 대한 애착은 집이 곧 자신의 정체성을 확보하는 공간이라는 바람에서부터 비롯되었다.
브랜드도 중요하다. 그러나 거주민들의 고유한 정체성을 담아내는 아름다운 집 이름이 더 소중하다. 요즘 볼 수 있는 근사한 브랜드는 자신의 고유한 정체성을 확보하기는커녕 오히려 브랜드 속에 자신을 규정지으려는 집단적 배타성을 드러내며,거품 그 자체로 존재한다.
부동산정부라고 규정할 만큼 모든 정책의 1순위가 부동산과 통하는 현 정부는 요즘 들어,부쩍 거품 논란을 제기하고 있다. 그런데 부동산의 핵심인 아파트 가격은 땅값과 건축비,개발이익의 단순한 합이다. 개발 이익의 극대화에는 아파트 브랜드 거품도 큰 몫을 한다. 땅값,건축비는 말할 것도 없고,우선 브랜드 가격 속에 존재하는 허망한 거품부터 빼보자.
국적불명의 아파트 브랜드 틈에서 바위 하나에도 의미를 찾아 이름 지었던 소박한 옛 지혜가 아쉬울 뿐이다. -김명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