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부산일보] 2006.02.08. 부일시론 -부산재생의 긴 호흡, 아나바다
- 작성일
- 2006-0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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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고관리자
도시에도 마치 사람처럼 생체적인 리듬이 있다. 지형과 공간에 따라,혹은 시간적인 결에 따라,도시는 그 속에 사는 이들의 욕구에 맞추어 다이내믹하게 진화한다. 유비쿼터스도시,아시안게이트웨이,최첨단자유무역도시…. 근간 발표된 부산 발전 2020 로드맵 7대과제 250여 개 항목에 따르면,15년 후 부산 시민은 세계 그 어느 곳보다 진화된 미래 첨단 도시에서 사는 가슴 벅찬 경험을 하게 될 것 같다.
리듬의 생명은 호흡이다. 부산의 목적지는 정해졌으니,이제는 천천히 가쁜 숨을 고르며 가보자. 자판기에 동전을 넣고 커피가 잔에 채 채워지기도 전에 손을 먼저 집어넣고,맛없는 자장면은 용서해도 늦게 배달된 자장면은 용서하지 하지 못하는 것이 우리의 습성이지 않는가.
도시 공간도 자원이다. 고갈되기 마련인 것이 자원이기에 다음세대와 공유해야 할 의무가 우리에게 있다. 로드맵의 개발 계획,478개 지역의 주거 재개발,재건축 계획 등이 모두 실행에 옮겨진다면,앞으로 부산의 100년은 지금 우리 시대의 숨 막히는 흔적으로 가득 채워질 것이다. 80조원 예산에 개발 기간 불과 15년! 재원확보도 문제이지만,그 짧은 시간에 빼곡히 들어설 공간 개발의 밀도에 우선 어지럽다.
뉴욕의 생명이라는 센트럴파크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한다. 1850년 폭발적인 인구 증가와 도시화에 따라,도시의 공간이 황폐화되고,공공녹지가 절대적으로 부족하게 되자,시인이었던 월리엄 브라이언트가 도심 공원을 주창하게 된다.
"지금 우리가 이곳 맨해튼에 공원을 만들지 않는다면,앞으로 100년 뒤 이곳엔 정신병자들로 가득 찰 것이다." 센트럴파크는 개발의 흔적이 아니라,도시를 지탱하는 인문정신에 의해 후대를 위해 남겨진 여백공간이다. 개발 못지않게 보존 혹은 유예의 지혜도 필요한 것이다.
부산 발전 로드맵의 핵심 중의 하나인 부산의 생명,북항 재개발. 친수공간을 만들고,해양 문화시설이 유치되고,바다와 도심의 장벽인 KTX 철로를 관통하는 등 좋은 아이디어가 많이 제안되었다. 그런데,이런 안들은 대개가 부수고,바다를 메우고,새로 짓는 전근대적인 묻지마 개발 기법들에 의존한다.
예를 들어 항만의 대표적인 흔적인 거대한 크레인과 창고들을 보자. 크레인은 테마놀이 공간의 독특한 오브제로 사용될 수도 있다. 거대한 창고 내부공간은 매력적인 외부 친수공간과 접하여 세계 어디에도 없는 근사한 비엔날레전용관으로 탈바꿈할 수도 있다. 텅 빈 사일로 냉장창고는 해양 수족관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지 않을까.
부산의 곳곳에 공동화된 공단 지역을 보자. 황폐화된 공단 지역에 철거와 아파트 재개발의 순환 고리를 끊고,영화촬영단지를 유치해보면 어떨까. 영상스튜디오의 본질은 공장과 같은 거대공간이니까. 기존 시설의 잠재성을 살려 리모델링한다면,천문학적인 건축비도 줄이고,과거위에 미래를 덧씌워 도시의 맥락을 유지하고 도시를 재생시킬 수 있을 것이다.
남는 재원을 활용한다면,근사하게 하드웨어를 만들어 놓고 소프트웨어를 운영할 재원이 없어 휘청거리는 많은 문화공간들의 선례를 바꾸는 방안도 된다.
개발패러다임의 방향을 조금만 돌려 도시에 아나바다 (아끼고,나누고,바꾸고,다시 쓰는 운동)의 정신을 적용해보자.
허름한 선창가 창고를 개조해 매력적인 보행자거리로 만든 싱가포르 워터프런트,군수창고와 양조장을 개조한 베이징의 다산쯔 798 예술단지와 지우창 예술단지,청조 말 근대주거지역의 흔적을 이용한 상하이의 신천지,항만물류창고를 리모델링한 뉴욕의 퀸즈모마미술관…하나같이 도시의 대표적인 아나바다식 명물들이다.
도시를 볼 때 거시적인 망원경도 필요하지만,미시적인 현미경도 필요하다. 현미경으로 도시를 섬세하게 들여다 보면, 재생의 아이디어를 기다리는 공간들이 우리에게 많이 있다.
도시의 비전은 우리를 위한 것만이 아니다. 지금 이 시대에 모든 것을 다 만들려고 하지 말자. 새롭게 짓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다. 다음 시대의 지혜로써 만들어 갈 수 있는 여지와 시간을 남겨두어야 한다. 어쩌면 그것이 가장 아름다운 도시의 비전이자 도시의 생체리듬을 유지할 수 있는 크고 긴 호흡인 것이다. -김명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