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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부산일보] 2006.01.07. 부일시론 -체질 개선의 처방전, 인문학

작성일
2006-01-07
작성자
최고관리자

1995년,삼풍백화점 붕괴,무장공비 침투,노·전 비자금 사건과 전직 대통령의 구속,대구가스폭발,씨프린스호 기름 유출,콜레라 발병….

2005년,줄기세포 논란,도·감청 X-파일,청계천,군총기 난사사건,6자 회담,호주제 폐지….

예나 지금이나 연말을 장식하는 10대 뉴스의 타이틀은 웬만해선 박수받을 일보다 그늘진 사회의 단면들이 부각되기 마련이다. 10년 전의 거울을 통해 지금을 비추어 보면,그나마 조금씩 업그레이드되어 가는 우리 사회에 조그마한 위안을 가질 수도 있게 한다. 적어도 냉전,권위주의,개발지상주의 등 거대 담론에서 비롯된 후진국형 전근대적 사건,사고에서는 벗어난 듯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의 우리 사회 역시 무언가 집요한 바이러스가 사회의 건강한 변화를 발목 잡고 있다는 사실에서는 여전히 우울해 진다.

'왜' 라는 근본적인 성찰은 생략한 채,'무엇을' '어떻게'라는 맹목적인 결과 중심의 병폐가 사회를 파행으로 몰아가기 때문이다. 이쯤에서 인문학의 의미를 떠올려 본다.

의사는 병든 사람의 고통을 치유하고 죽음에서 환자를 살려낸다. 그런데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 서 있는 환자를 괴롭히는 것은 육체적 고통만이 아니다.

'죽음은 왜 하필 나를 택하였나?' '삶과 죽음은 무엇인가?' '왜 죽음 앞에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가?' 등의 근원적인 물음 앞에 더욱 고통받는다. 이런 질문 앞에 의학적인 답들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 그래서 서구의 병원들에는 철학을 전공한 카운슬러가 환자들의 정신적인 물음에 답을 하도록 한다.

경영대학(MBA)에는 철학교수가 기업윤리를 가르치는 과정이 많다. 경영인에게는 '돈을 어떻게 버느냐' 못지 않게 중요한 문제가 '돈을 왜 버는가?'이기 때문이다.

인문학은 '왜'라는 질문을 던짐과 동시에 답함으로써,개인과 사회,그 사이의 모든 행위가 존재 이유를 갖도록 한다. '기술의 진보는 병적인 범죄자의 손에 쥔 도끼와 같다'라는 말이 있다. 특정 분야의 전문성이 윤리성과 공공성을 상실할 때 그 결과의 참담함은 역사가 이미 말해 주지 않았던가.

또한 인문학이 우리에게 주는 또 하나의 선물은 상상력이다. 인문정신을 매개로 하는 시,음악,미술 등의 예술은 삶의 겉치레 장식이 아니라 때로는 과학이나 기술의 한계를 근본적으로 뛰어넘는 촉매가 되기도 한다.

아인슈타인은 6세 때부터 바이올린을 켜고, 바흐와 모차르트를 즐겼다. 훗날 상대성원리를 발표한 후,친구에게 "과학의 위대한 업적은 직관으로부터 시작된다. 나의 직관을 키워준 것은 예술이었다" 라고 말하였다. 그는 자신이 지식을 흡수하는 재능보다 더 큰 상상력을 가진 것에 더욱 감사해 하였다. 더불어 아인슈타인은 상대성원리가 철학자 라이프니츠의 '공간은 상대적인 것'이라는 명제에 영감을 받았음을 회고하였다. 과학,철학, 예술의 절묘한 교감이 상대성원리라는 걸작을 만들어 낸 것이다.

새가 살 수 없는 곳엔 사람도 살 수 없다는 말이 있다. 마찬가지로 인문학이 발을 붙일 수 없는 토양이라면 다른 학문도 발을 붙일 수 없는 것이다. 사회와 인간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 없이 각개약진 식으로 이룬 전문 분야별 발전은 사상누각에 불과하다.

한국병이라는 바이러스를 치유하는 유효한 처방전 가운데 하나가 인문 정신의 부활임은 자명하다. 그러나 인문학은 마치 사상의학과도 같이 근본적인 체질을 개선하는 것이므로 성급한 효험은 기대하지 말자. 아마도 먼 훗날 인문정신이 결합된 21세기 신르네상스형 10대 뉴스로 어렴풋이 나타날 따름일 것이다.

인문정신의 덕목이 '느림'이기에.   -김명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