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부산일보] 2006.11.04. 지하철 따라 부산공간 읽기 -(9)장산, 중동, 해운대역
- 작성일
- 2006-11-04
- 작성자
- 최고관리자
동해남부선과 함께했던 시대의 해운대는 그야말로 낭만으로 가득 찬 도시 밖의 일탈적 공간이었다.
천혜의 경관과 온천,더불어 맛거리가 풍성한 유흥의 공간들은 해방 후 대표적인 신혼여행지로 각광받던 판타지한 장소였다.
이런 여유로운 낭만성은 지금도 여전히 부산비엔날레,바다축제,부산국제영화제 등 비일상적인 흥겨움으로 이어진다.
신시가지 개발과 더불어,지하철 2호선의 개통은 전통적인 휴양지 해운대에 일상적인 주거지로서의 면모를 더했다.
해운대가 지닌,종합선물세트와 같은 다양한 맛은 바로 휴양지로서의 비일상성과 주거지로서의 일상성의 충돌,혹은 대비에서 우러나온다.
해운대의 이미지는 단연 바다로 느껴지나,그것은 천만의 말씀이다. 해운대가 지닌 속살의 아름다움은 오히려 도시공간이 지닌 다양한 면모가 대비되고 포개지는 틈 속에서 발견된다.
이런 틈들은 대개 도시계획가가 디자인을 했다든지,혹은 행정 관료에 의해 기획된 것들은 아니다.
오히려 버려졌기에 개발의 틈새 속에서 자생적으로 살아남은 흔적들이다.
국철 해운대역과 지하철 해운대역이 중심이 되는 구시가지를 따라 걸어보자. 바다로부터 장산으로 이르는 해운대의 평면은 무척 다양하고 이질적인 겹(layer,도시의 공간적 시간적 틀)들이 중첩되어 입체적이다.
특급 호텔이 즐비한 해변가의 화려한 파노라마,그 배면에는 미 609 탄약창고의 배후 지원세력(?)이었던 집창촌(속칭 609)의 흔적과 이들 유곽이 재현된 고급 유흥주점들과 모텔촌이 그려내는 내밀한 욕망과 환락의 풍경을 볼 수 있다.
이를 지나면 뜬금없이 나타나는 해운대재래시장의 부산함,그 옆에 서서 서울의 코엑스몰보다 더 큰 규모로 지역 상권을 모두 흡수하려는 듯 자리 잡은 스펀지,큰 길 건너 해운대역과 동해남부선의 철길을 지나면 우동의 자글자글한 일상의 주거지들,그리고 이 모두를 품고 있는 장산….
불과 1㎞ 남짓 짧은 거리 속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공간의 변화. 이런 역동적인 풍경의 거리가 해운대 말고 또 이 세상에 있을까?
뿐만 아니다. 스펀지를 보더라도 도시의 길을 내부로 끌어들여,마치 재래시장과 같은 아웃도어로드의 형식을 취해 외부의 거대한 매스와는 달리 내부 매장은 자글자글한 공간의 집합으로 이루어진 것도 해운대 구시가지의 공간적 특징과 무관하지 않다.
스펀지가 자리 잡은 동쪽 모퉁이를 돌아가면 폭 4m 정도의 실개천인 춘천 지류가 흘러가고 그 옆에 마치 수상가옥과도 같은 남루하지만 작고 아름다운 건물들을 발견할 수 있다.
실타래처럼 엮여 있는 좁은 골목길들,하천이 만들어 내는 휴먼스케일의 풍경과 그 배경에 있는 스펀지의 묘한 스케일 대비는 또 다른 해운대만의 풍경이다.
옛 일본식 적산가옥들,근대 한옥들 틈 사이로 보이는 고층아파트의 모습. 이런 대비적인 풍경은 구시가지 곳곳에서 만날 수 있다.
동해남부선 국철은 신시가지와 구시가지의 경계를 확연히 단절시킨다. 폐쇄적인 방사원형으로 설계된 신시가지는 개방적인 선형의 구시가지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1996년 5월 신시가지에 사람들이 입주하기 시작해 올해로 10년. 환형 순환도로를 따라 구획된 필지에 정주 인구 12만 명을 위한 아파트가 빼꼭히 들어차 있다.
산과 철로로 둘러싸인 공간구조가 말해주듯 해운대 안에 있으면서 해운대의 맥락과는 무관한 도시 속의 도시,신시가지가 만들어졌다.
이렇듯,답답하고 획일적인 신시가지 속에도 숨이 틔는 의외의 공간이 있다.
해운대 신시가지 중심인 장산역 부근의 약 15만 평 규모의 미개발지,제척지(개발제외 구역)가 그곳이다.
개발 당시,토지보상비가 농지였던 인근지역에 비해 대지였던 제척지는 약 5~6배에 달해 재원조달이 문제였고,100만 평이 넘는 토지개발은 건교부가 주관하도록 되어 있어 부산시는 개발의 주도권을 위해 제척지를 제외시켰던 것이다.
사람들은 이 제척지가 난개발의 원흉이자 도시 속의 오지라고도 하나,시각을 달리하면 고층 판박이 아파트로 덮인 신시가지에 그나마 휴먼스케일의 공간들은 제척지 속에서만 존재한다. 대표적인 예가 좌동재래시장이다.
생동감 넘치는 시장 속 좌판과 골목길은 마치 신시가지의 허파와도 같다. 그 어느 신시가지에 이 같은 재래시장이 또 어디 있으랴.
제척지 곳곳에는 주택 등을 맛깔스럽게 리모델링한 재미있는 상가 등도 많다.
일본풍의 일식요리집,유럽풍의 와인바,테라스형 레스토랑 등등이 가로의 표정을 풍부하게 표현해 준다.
질서정연하게 기하학적으로 설계된 신시가지의 중심에 자글자글 자연스러운 유기적인 옛 길과 땅의 존재는 도시의 숨통을 열어준다. 개발의 덕목이 획일성은 아니지 않는가.
개발의 틈새에서 소외된 영역들,큰 건물들 틈의 작은 공간들,과거가 지워지는 틈 속에 남아있는 흔적들은 해운대의 숨어 있는 매력이다.
해운대에서의 틈은 시공간적 유보 공간으로서,개발과 보존 등의 획일적인 대립이 아니라,그것들을 소통시키는 통로이다. 단지 개발에 밀려 있는 초라한 모습이기보다는 일상성과 비일상성의 역동적인 대비 속에 남아 있는 가능성 그 자체이다.
곧 폐쇄 예정인 동해남부선 철도 부지,제척지,그 언저리의 작은 공간들이 만들어내는 틈들. 해운대에서의 틈은 현대 도시가 품고 있는 다양한 가치들의 충돌 속에서 미래가 남겨진 공간들인 것이다. -김명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