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부산일보] 2006.10.30. 부일시론 -간판, 도시 미학의 전도사
- 작성일
- 2006-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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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고관리자
"도대체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지?"
보고 있자면 도무지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 요즘 텔레비전 CF 광고이다.
특히 10대,20대를 대상으로 하는 광고를 보면 직접적인 상품에 대한 홍보는 슬그머니 감추어 둔 채,현란한 이미지와 감성적인 메시지가 전면에 드러난다. 사이버적인 미래 공간의 배경 속에 힙합,디지털 놀이 등이 결합되어 한 편의 광고를 보면 이 시대를 이끄는 감각적인 문화 트렌드마저 읽을 수 있다. 원시시대에는 신화가 지배했지만,현대사회에서는 광고가 지배한다는 말이 실감난다.
다들 간판 풍경을 통해 도시를 인식하고,간판과 호흡하며 산다. 건축물이 마치 사람에게 옷과 같은 존재라면,간판은 그 옷을 맵시 있게 표현해주는 스카프,넥타이 혹은 단추와 같은 역할을 한다. 간판은 건축물은 물론이고,그 속에 사는 사람들의 개성을 강렬히 드러내는 '가로의 얼굴'이다.
그러나 우리 도시풍경을 지배하는 간판을 보면,무질서,무개성,무차별적인 모습으로 오히려 인지성을 떨어뜨리고 혐오감마저 준다. 가히 시각 공해의 바다라 할 만하다.
가까운 예로 아파트 단지 상가를 보자. 1층이 슈퍼마켓이며,세탁소며 2층이 학원임은 누구나 안다. 그럼에도 형형색색의 간판들로 도배가 되어있다. 도시의 가로는 훨씬 심각하다. 자극적인 네온,건물 외벽은 물론이고 창문마저 뒤덮은 조악한 광고판들,공공가로영역마저 침범하기 일쑤인 입간판들. 문화를 이끈다는 매체광고에 비해,옥외광고물로 일컫는 간판은 도시환경의 중요한 요소임에도 불구하고 문화 자체를 언급하기조차 민망한 실정이다. 간판이 이 지경에 이른 근본적인 원인이야 개별 업소의 생존 전략에 따른 고육지책이겠지만,우선 법적 제도가 명확하지 않다.
제정된 지 40년이 지난 '옥외광고물 관리법' 등은 상황에 따라 임기응변식 땜질용으로 만들어져,단지 경제활동을 지원하기 위한 부산물로 해석하여 현대 사회의 요구에는 맞지가 않다. 복합상가처럼 아예 간판으로 건물이 도배되는 경우에도 법적으로는 하자가 없는 경우도 많다. 위법과 적법의 경계선조차 애매한 실정이라,일선 공무원도 헷갈려 거리에 걸린 간판이 적법한지 판가름할 사람조차 없는 형편이다. 간판의 종류만 해도 16가지이고,위치,규모,지역,신고 혹은 허가,금지 혹은 완화 등 법체계가 혼란스럽기 그지없다.
그런데 뉴욕의 타임스스퀘어,홍콩의 침샤츄이나 완차이,오사카의 도톤부리 등은 오히려 간판으로 도시의 이미지가 읽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타임스스퀘어는 형형색색의 차원을 넘어,세련된 첨단 광고 기법으로 건물과 일체화되어 오히려 건축인지 광고물인지 모를 정도이다. 홍콩의 경우,가로 위 공중에 매달린 간판은 허용하더라도,인도 위의 입간판은 철저히 통제하고,톡톡 튀는 간판은 오히려 장려를 한다. 오사카의 경우 역시 어지러움 속에서도 고도로 정제된 질서를 가지고 있어,도시 미학의 전도사 역할을 한다. 간판 없이는 생동감 넘치는 이 도시들을 상상하지 못할 정도이다.
우리의 경우,법과 제도가 간판이 지닌 의미를 간과하여 미학적인 잠재력을 예상치 못했다. 간판을 규제의 대상으로만 보니,악화가 양화가 구축하듯. 법망만 피하면 된다는 식으로 간판들이 걸렸다. 그 결과 결국 난잡하기 그지없는 이 모양의 도시가 된 것이다.
광고를 비롯해 대부분의 문화적 산물들은 디자이너,혹은 스타일리스트 등의 손을 거쳐 새롭게 태어난다. 유독 간판만이 크고 화끈하게 튀어야만 하는 무개념적 유아독존으로 난립하니,디자인은 물론,경관과의 조화는 아예 실종된 지경이다. 간판이 상상력을 바탕으로 자유로운 디자인 마인드와 만날 수 있을 때,도시의 가로와 간판은 서로 상생하며 소통할 수 있을 것이다.
"광고는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예술 형태이다"라는 마셜 매클루언의 말처럼,일상에서 가장 많이 접하고,우리의 시공간을 지배하는 것이 간판이라면,이는 곧 공공예술로서 가치를 가져야 한다. 이를 위해 간판의 생산자이자 소비자인 도시민의 수준 높은 안목은 물론이고 법과 제도의 패러다임 전환이 필수조건이다. -김명건